
1933년, 근현대 실업가인 저우즈쥔(周志俊)은 유럽과 미국의 방직업을 고찰하고자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귀국길에 ‘노를 두드리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외국에서 배우고 습득한 지식으로 칭다오 화신 방직 공장(青島華新紗廠)에서 한바탕 일할 준비를 한다. 공장은 방추(紗錠) 44,000개, 방적기(布機) 500대의 규모로 성장해 많은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이 중국 침략 전쟁을 일으켜 칭다오가 함락되자 그는 할수없이 기계 일부를 상하이로 옮기게 된다. 그리하여 신허 방직 공장(信和紗廠)이 생기게 되었고 푸투오취(普陀區) 모간산로(莫幹山路) 50호 M50 창의원의 첫번째 건물이 들어섰다.

현재 이곳에서는 웨이브메이커들이 사진을 찍고 문학청년들이 전시회를 관람한다. 오늘날 M50 창의원은 보일러실이 갤러리가 되고, 방적공장 공공 통로에는 네온사인이 걸려 있으며, 얼룩진 벽에는 벽화들이 생기고, 녹슨 대문 안에서는 현대 예술이 말을 한다.

푸투오취 문화관(普陀區文化館) 의 중징워이(鐘經緯) 관장은 이곳이 쑤저우허판(蘇州河畔)의 중요한 문화 랜드마크가 된 것은, 한편으로는 도시 재생 과정에서 산업 문명의 문맥을 보존한 덕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우즈쥔(周志俊)의 분투한 덕분이라고 했다.
신허(信和)의 영어 표기는 'New China(신중국)', 인단트렌 블루는 '애국 블루(愛國藍)'라 했다. 새로 사들인 트럭 200대로 자체 생산한 면실과 전략 물자를 실어 후방을 지원하는데.... ...결국 저우즈쥔은 일본 비밀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고, 1941년 신허방직공장 사무실을 빠져 나오던 중 총을 맞는다. 수개월간 병원에서 치료받은 후 가족을 데리고 톈진(天津)으로 갔지만 상하이에서의 사업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이 신허방직공장을 접수하게 되고 공장은 강제로 생산 을 중단한다. 그 순간부터 저우즈쥔은 기업의 부흥을 위해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는 상하이 주식 시장에 진출해 자금을 모으고, 어려움에 처한 지식인들을 조직하여 '구련 설계 위원회(久聯設計委員會)'를 설립해 전후 생산 발전의 청사진을 그린다.

M50 창의원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에나멜 컵(搪瓷杯)'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상하이 춘밍 방직 공장(上海春明粗紡廠)의 큰 철문을 컵 몸체로 하고 뚜껑과 손잡이가 달려 있다. 상하이 춘밍 방직 공장은 새 중국이 창건된 후 신허 방직 공장의 네 번째 명칭이다.

저우즈쥔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갖은 시련 속에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오늘날 쑤저우허(蘇州河)는 고요히 흐르고 있고, 현대인들은 시대적 명제를 놓고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코스:
창화루 부두(昌化路碼頭) — 천안천수(天安千樹) — 상하이 방직 박물관(上海紡織博物館) — 상하이 조폐 박물관(上海造幣博物館) — 창향 타워(創享塔) — M50 창의원(M50創意園) (翻译:金美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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